전시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2》
Exhibition 《Only Silence Does Not Betray, part. 2》
이수진
휴먼 인프라스트럭쳐
유세은
2026년 10월 3일 (토) - 10월 18일 (일) *월, 화 휴관
13:00–19:00
팩션 faction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로6길 26 지하1층 @faction.seoul )
큐레이터: 윤태균
사진 기록: 김해찬
주최, 주관: 팩션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기문화재단
침묵의 실체에 관하여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면,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하는 일은 그 한계선을 존중하며 멈춰서는 태도로 여겨져 왔다. 한계 너머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봉인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계를 조망하기 위해 굳이 언어 바깥의 신비로 물러설 필요는 없다. 되려 한 층 위로 올라서야 한다. 한계는 바깥에서 신비화되는 대신 위에서 내려다보인다. 위치를 옮기는 대신 목소리를 키우는 사유는 곧잘 유치해진다. 인간의 사회성이 불가해한 기계로 흡수되고, 언어의 공회전이 세계의 붕괴 위에서 증식만 하는 지금의 국면은 히스테리에 가깝다. 발화가 커질수록 그 아래 깔린 구조는 묻히기에, 비명이 잦아들어 침묵에 가까워질 때에야 세계는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 없이 세계를 곧장 하나의 단언으로 굳히려는 유혹이다. “모든 것은 x이다”라는 선언은 존재론과 정치를 손쉽게 단락(short-circuit)시키고, “우리가 y만 할 수 있다면...”이라는 헛된 해방의 약속으로 미끄러진다. 총체적 세계상에서 해방의 청구서를 발행하는 예술도 다르지 않다. 기약 없는 웅성거림에, 자신을 걸지 않은 술어를 하나 더 보탤 뿐이다. 이 보탬은 예술적 개입이 실재적 배치를 앞지를 수 있다는 가정에 기댄다. 그러나 실재는 사유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뿐 사유는 실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비가역성 안에서 큐레토리얼의 개입은 전시의 배치(assemblage)에 사후적이거나 평행할 수만 있을 테다. 그렇다면 이 서문은 전시의 형태-형상과 합치될 수 있는가?
침묵은 과잉이기도 하다. 큰 소리가 작은 소리를 덮어 들리지 않게 하듯, 포화된 발화도 실재를 가린다. 포화에 이르면 어느 것도 변별되지 않아 이 상태는 소리의 부재와 구분되지 않는다. 침묵은 노이즈가 도달한 과잉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노이즈는 정렬되지도 압축되지도 않는 상태이다. 현시적 의미는 세계를 정렬하고 압축해 얻은 결과이고, 그 외의 것은 잔류하는 소음-노이즈로 남는다. 전시는 그 나머지로서의 풍부한 위상에 천착한다. 실재는 언제나 또 하나의 과잉으로, 곧 침묵으로 도착한다. 의미의 부재를 공백으로 남겨 신비화하기보다는 의미를 예술과 언어의 오인이 빚은 나르시시즘의 산물로 다루기. 그럼으로써 실재의 복원이 이루어진다. 인간적 의미는 가련하고 얄팍한 우리의 인간성만을 위로할 뿐이다. 침묵은 소거와 과잉이다. 그 소거는 허무를, 과잉은 부조리를 낳는다.